매 화
- 이 병 기 -
외로 뎌더두어 미미히 숨을 쉬고
따뜻한 봄날 돌아오기 기다리고
음음한 눈얼음 속에 잠을 자던 그 매화
손에 이아치고 바람으로 시달리다
곱고 급한 성결 그 애를 못 삭이고
맺었던 봉오리 하나 피도 못한 그 매화
다가오는 추위 천지를 다 얼려도
찾아드는 볕은 방으로 하나 차다
어느 뉘 다시 보오리 자취 일흔 그 매화
동 백
- 정 훈 -
백설이 눈부신
하늘 한 모서리
다홍으로
불이 붙는다
차가울사록
사모치는 정화(情火)
그 뉘를 사모하기에
이 깊은 겨울에 애태워 피는가.
이별 노래
- 정호승-
떠나는 그대
조금만 더 늦게 떠나 준다면
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
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
그대 떠나는 곳
내 먼저 떠나가서
그대의 뒷모습에 깔리는
노을이 되리니
옷깃을 여미고 어둠 속으로
사람의 집들이 어두어지면
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
떠나는 그대
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
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
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
바다와 나비
- 김기림-
아무도 그에게
수심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
흰나비는
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
청무우밭인가 해서
내려갔다가는
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
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.
삼월달 바다가
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
나비 허리에
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.
남으로 창을 내겠소
- 김 상 용-
남으로 창을 내겠소
밭이 한참갈이
괭이로 파고
호미론 김을 매지요
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
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
강냉이가 익걸랑
함께 와 자셔도 좋소
왜 사냐건
웃지요
사슴
- 노천명-
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
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
관이 향기로운 너는
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
물 속에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
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
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
슬픈 모가지를 하고
먼 데 산을 쳐다본다.
나그네
- 박목월-
강나루 건너서
밀밭길을
구름에 달 가듯이
가는 나그네
길은 외줄기
남도 삼백 리
술 익는 마을마다
타는 저녁놀
구름에 달 가듯이
가는 나그네
흔들리며 피는 꽃
- 도종환-
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
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
다 흔들리며 피었나니
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
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
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
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
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
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
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