자료 3
나 목
- 남 재 만 -
모두 떠나 버리고
다 숨어 버린
동천(冬天)
시퍼런 서슬에
너만 혼자
알몸으로 서 있구나
가 버린 것
숨어 버린 것
끝내 불러내고 찾아내려
너는
그토록 아픈
술래로 서 있구나
황 혼 (黃昏)
- 이육사-
내 골방의 커튼을 걷고
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
바다의 흰 갈매기 같이도
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
황혼아 내 부르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
내 뜨거운 입술을 마음대로 맞추어 보련다
그리고 내 품안에 안긴 모든 것에게
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 다오
저 십이성좌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
종소리 드문 산림 속 그윽한 수녀들에게도
시멘트 장판 위 그 많은 수인들에게도
의지가지없는 그들의 심장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
고비사막을 걸어가는 낙타 탄 행상대에게나
아프리카 녹음 속 활 쏘는 토인들에게라도
황혼아, 네 부드러운 품 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
지구의 반쪽만이라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다오
내 오월의 골방이 아늑도 하니
내일도 저 푸른 커튼을 걷게 하겠지
암암이 사라지는 시냇물 소리 같아서
한 번 식으면 다시 돌아올 줄 모르나 보다
섬진강 2
- 김용택-
저렇게도 불빛들이 살아나는구나
생솔 연기 눈물 글썽이며
검은 치마폭 같은 산자락에
몇 가옥 집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
불빛은 살아나며
산은 눈 뜨는구나
어둘수록 눈 비벼 부릅뜬 눈빛만 남아
섬진강물 위에 불송이로 뜨는구나
밤마다 산은 어둠을 베어내고
누이는 매운 눈 비벼 불빛 살려 내며
치마폭에 쌓이는 눈물은
강물에 가져다 버린다.
누이야 시린 물소리는 더욱 시리게
아침이 올 때까지
너의 허리는 두껍게 감기는구나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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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른 아침 어느새
너는 물동이로 얼음 깨고
물울 퍼 오는구나
아무도 모르게
하나 남은 불송이를
물동이에 띄우고
하얀 서릿발을 밟으며:
너는 강물을 길어 오는구나
참으로 그날이 와
우리 다 모여 굴뚝마다 연기나고
첫날밤 불을 끌 때까지는
스스로 허리띠를 풀 때까지는
너의 싸움은 너의 정절은
임을 향해 굳구나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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섬진강 3
- 김 용 택 -
그대 정들었으리
지는 해 바라보며
반짝이는 잔물결이 한없이 밀려와
그대 앞에 또 강 건너 물가에
깊이 깊이 잦아지니
그대 그대 모르게
물 깊은 곳에 정 들었으리
풀꽃이 피고 어느새 또 지고
풀씨도 지고
그 위에 서리 하얗게 내린
풀잎에 마음 기대며
그대 언제나 여기까지 와 섰으니
그만큼 와서 해는 지고
물 앞에 목말라 물 그리며
서러웠고 기뻤고 행복했고
사랑에 두 어깨 깊이 울먹였으니
그대 이제 물 깊이 그리움 심었으리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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기다리는 이 없어도
물가에서
돌아오는 저녘길
그대 이 길 돌멩이
풀잎 하나에도
눈 익어 정들었으니
이 땅에 정들었으니
더 키워 나가야 할
사랑 그리며
하나둘 불빛 살아나는 동네
멀리서 그윽이 바라보는
그대 야윈 등
어느듯
아름다운 사랑 짊어졌으리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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섬진강 15
김 용 택
산 사이
작은 들과 작은 강과 마을이
겨울 달빛 속에 그만그만하게
가만히 있는 곳
사람들이 그렇게 거기 오래오래
논과 밭과 함께
가난하게 삽니다
겨울 논길을 지나며
맑은 피로 가만히 숨 멈추고 얼어있는
시린 보릿잎에 얼굴을 대 보면
따뜻한 피만이 얼 수 있고
따뜻한 가슴만이 진정 녹일 수 있음을
이 겨울에 믿습니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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달빛 산빛을 머금으며
서리 낀 풀잎들을 스치며
강물에 이르면
잔물결 그대로 밤짝이며
가만가만 어는
살땅김의 잔잔한 끌림과 이 아픔
땅을 향한 겨울 풀들이
몸 다 뉘인 이 그리움
당신
아, 맑은 피로 어는
겨울 달빛 속의 물풀
그 풀빛같은 당신
당신을 사랑합니다
시 감상 끝